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이 학문적인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낙관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 제임스 볼드윈, <흑인과 미국의 약속>(1963년 프로그램)

🔖 증언적 불의에 이의를 제기하려면 우리가 의지하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신뢰를 배분하는 방식을 근본부터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무비판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우리가 이미 무비판적으로 신뢰를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랑비에 옷 젖듯 주입당한 견해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날 때 우리는 분명히 진실에 좀 더 가까운 쪽으로 나아가게 될 것 이다.

🔖 설명을 독점한 자들이 주변화된 집단의 욕구에 부응하는 설명 -그들의 억압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필요한 설명도 여기에 포함된다-을 개진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결과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거나 자기와 관련된 부정확한 설명을 바로잡는 데 동원할 수 있는 개념적 자원이 부족하다. 그들은 설명적 불의에 놓여 있다.

🔖 우리가 희생양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하는 이유는 구조적 문제와 거기서 비롯되는 개인의 고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치유법을 달리 제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좌절감을 전가하는 상징이 된다. 다시 말해, 구조적인 불의는 개인의 행동들이 합쳐지면서 발생한다. 단기적으로는 피해 사례에 대처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법들이 있어야만 한다.

🔖 하지만 굴욕이나 배제의 위협은 신중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저해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견해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역효과를 낳는다. '반향실 효과'가 이런 식으로 발생한다. 특정한 사회 환경에서 수용되는 관점을 메아리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공개 저격당하는 스트레스와 당흑감(혹은 그 이상)을 피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정의 운동에는 좋지 않은 소식이다. 사회 정의 운동은 대안적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실행하기 위해 용기, 창의성, 의견 차이를 제공해야 할 뿐 아니라 저항이 늘 지속되는 실천에 대한 이해를 키워줘야 한다.

🔖 모든 문제를 공식화해보면 동일한 답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는 글렀다.' 우리는 피폐한 세계 속에서 계속 싸우고 있고, 철학자 테오도어 W. 아도르노가 1951년에 썼듯이 "잘못된 삶을 올바르게 살 수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이 불의한 시스템을 떠받치는 들보를 공격해 구조물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갈라진 틈새로 빛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거대한 일이지만 우리의 존재도 거대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